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게토 봉기 (문단 편집) === 4월 19일 : 유대인의 승리 === 1943년 4월 18일, 무력으로 게토를 제압하고 이송 작전을 개시한다는 정보가 전해졌다. 즉시 게토의 주민들에게 경고가 알려지고, 벙커에서 대독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. 하인리히 힘러는 [[아돌프 히틀러|히틀러]]의 생일인 4월 20일을 기념하여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기로 결정했다. 4월 19일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[[유월절]]의 첫 번째 날이기도 했다. 4월 19일, 오전 3시 2,000여 명의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를 포위했다. 이 부대는 그리 전력이 대단치 않아서, 훈련이 부족하거나,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, 폴란드 [[총독]]부 휘하 폴란드 [[경찰]]과 폴란드 [[소방관|소방]]대도 동원되었다. 전차는 프랑스제 [[경전차]] 뿐이었다. 오전 6시 경에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로의 침입을 시작했다. 유대인 레지스탕스들은 [[화염병]]으로 전차를 공격하고, 무장친위대 대원들에게 발포했다.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태만해 있었던 부대는 의외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7시 30분에 패주했다. 하인리히 힘러는 8시에 지휘관을 교체했고, >'''"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사냥은 가차없는 결단력과 냉혹한 방법으로 실시하라. 공격은 강력할수록 좋다. 최근의 사례는 [[유대인]]이 어떻게 위험한지를 보여준다."''' 는 명령을 내렸다. 그러나 [[유대인]]들의 격렬한 저항 끝에 오후 5시 독일군은 [[전차]] 1대와 [[장갑차]] 1대를 잃고, 게토에서 임시 철수했다. 이날 전투는 이렇게 종료되었다. 여성 레지스탕스 지도자 치비아 루베트킨(Cywia Lubetkin)은 이 날의 승리에 대해서 >'''"아주 기뻤다. 내일 일은 신경쓰이지 않았다. 우리들 유대인 투사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. [[화염병]]과 [[수류탄]]에 겁을 먹고, 무적의 용사로 보였던 독일군이 후퇴했던 것이다."''' 라고 회상했다.[* 훗날 운 좋게 살아남은 치비아 루베트킨은 이후 [[이스라엘]] 건국 과정에도 참여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